朱正善
2019-07-10 17:04:14 출처:cri
편집:朱正善

리수족의 역사

圖片默認標題_fororder_傈僳族婦女

리수족은 몽골인종 남아시아 유형에 속하는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민족언어는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 어족이족어 갈래에 속하며 문자는 신,구 리수문으로 나뉜다.

리수족은 주로 중국의 운남성과 티베트자치구가 미얀마 카친주와 접경한 지역의 누강(怒江), 그리고 언메이카이강(이라와디강)유역에 모여 살고 있다. 그 외 중국 운남의 기타 지역과 인도 동북부, 태국과 미얀마 접경지역에도 일부 산재해있다. 2010년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중국 경내의 리수족 총 인구는 126만 명 정도이다.

리수족은 그들의 자칭이자 타칭이기도 하다. 리수족이란 민족 명은 최초로 당나라 때 저서에 나타났다. 당시 번작(樊綽)은 ‘만서’(蠻書)에서 리수족을 리수(栗粟)라고 호칭했으며 그들이 ‘오만’(烏蠻)의 한 구성부분이라고 여기고 리수족이 이족과 나시족과 관계가 긴밀하다고 적었다. 명나라 때에도 리수를 ‘라라’(羅羅), 이족의 한 갈래로 분류했다. 리수(傈僳)라는 명칭은 관련 서적에서 서로 다른 글자로 표기는 해왔으나 100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리수로 불리워 왔음을 알 수 있다.

자자손손 전해져 내려온 리수족의 ‘창세기’ 전설은 대량산(大涼山)과 소량산(小涼山)의 이족, 나시족, 하니족의 창세기 전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이 역시 리수족이 이족어 갈래의 여러 민족과 예로부터 긴밀한 친인척관계였음을 설명한다. 고대에 하나의 족원에 뿌리를 둔 이들은 기나긴 역사발전과정에 점차 분화되어 서로 다른 부락으로 나뉘고 차츰 단일 민족을 형성했다. 체질 인류학 차원으로 본다면 리수족은 나시족, 이족, 하니족, 라후족 등 고원 민족의 특징이 있으며 신장이 길고 콧마루가 높고 입술이 얇으며 눈이 오목하게 들어가 남아시아어계의 와족, 부랑족, 장족, 따이족과는 선명한 차이가 난다. 이런 차별점은 이족어계 여러 민족이 친인척관계이고 공통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누강 지역의 리수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까지 씨족제도와 토템숭배를 이어왔다. 리수족의 몇몇 씨족의 명칭과 토템숭배의 형식이 대량산과 소량산 이족 씨족의 명칭과 토템제도와 거의 비슷하다.씨족은 혈연친지관계에 따라 무어진 그룹으로써 본 씨족 성원이 아니면 같은  명칭과  토템을 사용할 수 없다. 때문에 씨족 성원들은 모두 공동의 조상의 후대임을 공인한다. 리수족에 이족처럼 호랑이, 참대, 물고기 등 씨족이 존재하고 서로의 전설도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들이 고대에 긴밀한 씨족혈통 관계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동한과 서한시기의 ‘수’(叟), ‘휴’(巂)와 동진, 서진시기의 ‘동찬’(東爨), 당나라 때 ‘오만’에도 리수족의 선민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3세기 이전까지 통일된 족칭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통일된 조직도 없었고 다만 크고 작은 부락에 산재해 있었다.

그러다 당 나라때 리수라는 명칭이 처음 사서 ‘만서’에 등장했다. ‘만서’는1200여년전 리수족과 나시족 선민의 지리적 분포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했는데 이 두 민족을 기타 다른 부락과 구분시켰다. 송나라 때의 문헌에는 리수족 관련기재가 아주 적다. 그 원인은 북송이 나라를 세운 후 대도하 이서 지역을 대리국 관할지로 묵인하고 이 지역에 대한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 문헌과 지방지에 다시 리수족 관련 기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록을 본다면 리수족을 이족의 한 갈래로 정의했으며 리수족이 수렵이나 채집을 위주로 하며 농업사회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적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도 대부분 리수족은 여전히 수렵이나 채집에 의거했다. 그들은 금사강(金沙江)양안에 살며 려강(麗江)토지부목씨(土知府木氏)의 통치를 받았다. 원나라와 명나라때 리수족 선민은 제1차, 제2차 대규모 이주를 진행해 청해-티베트 고원으로부터 사천 분지 서쪽 변두리를 지나 운귀고원 북부에 이주했으며 주로 사천과 운남성의 아롱(雅礱)강, 금사강 유역에 정착해 원나라와 명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려강 목토사(木土司)와 티베트 지방정치그룹간 세력권 쟁탈싸움으로 전쟁이 빈발하자 리수족 은 난창강을 지나고 설산을 넘어 차츰 누강 지역에 이주했다.이주 과정에 리수족의 거주지가 부단히 확장되었고 기타 민족과 잡거하기도 했다. 19세기 20년대 청나라는 리수족이 분포한 려강과 영승(永勝), 화평(華坪) 등 지에서 토사를 류관으로 대체해 이 지역 봉건영주 경제를 지주 경제로 탈바꿈시켰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많은 한족과 바이족, 나시족이 이 지역에 진입하면서 대량의 철기 농기구와 선진적인 생산기술을 갖고 왔다. 그 후 리수족 지역에도 서방열강들이 쳐들어와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장시기동안 광범한 리수족 인민은 본 민족과 기타 민족의 지주, 토사두목과 국민당, 제국주의의 잔혹한 착취와 압박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해왔다. 통치계급과 제국주의 정치압박과 경제약탈은 리수족 인민들의 끊임없는 항쟁을 불러일으켰다.이들은 한족과 따이족, 징퍼족 등 각 족 인민들과 어깨 겯고 침략자들이 누강을 건느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인민해방군은 선후로 란평, 벽강, 누강 지역을 해방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리수족 사회의 발전은 비교적 느린 편이다. 20세기 50년대 민주개혁 전까지 리수족 사회는 일부 원시씨족 제도의 잔여형식을 보류하고 있었다. 또한 문자화된 법률도 없이 관습에 따라 사회를 영위해나갔다. 하지만 건국 후 국가법률법규를 전제로 각 마을마다 마을 규범에 따라 효과적인 관리를 해나가고 있다.

1957년 중국은 자체로 창제한 자모가 없는 구조가 완전하지 못한 리수족의 구 리수문을 폐지하고 라틴자모를 기반으로 한 신 리수문을 창제했다. 한어-티베트어계 티베트미얀마어족 이족어 갈래에 속하는 리수족의 언어는 비교적 통일되어 누강, 녹권(祿勸)  두 방언으로 나뉘지만 사용하는 어휘가 거의 비슷하여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하다.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
기타 플랫폼
CMG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