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香花
2020-10-19 11:48:56 출처:cri
편집:權香花

자필 이력서에서 찾은 의용군 선전대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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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의 동화 세계에 날아들었다. 그러나 군 생활은 필경 음악이 흐르는 그런 꽃 같은 낭만이 아니었다.

반춘방(潘春芳)은 1945년 12월 화전(樺甸) 군정대학에 입학, 6개월 후 조선의용군 7지대에 편입되었다. 96세의 이 노인은 조선의용군의 현존하는 제일 마지막 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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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춘방 노인의 자필 이력서

북경 서부의 한 아파트단지의 거실에서 반춘방을 만났다. 그는 우리를 만난 후 10년 전에 짬짬이 적었던 무려 수십 페이지의 자필 회고록을 내놓았다.

반춘방은 한국 경상남도 통영군의 양반가족 출신이라고 한다. 조부는 큰 목수로 늘 밖에서 돌아쳤고 조모님이 가사(家事)와 농사를 거의 혼자 도맡다시피 했다. “할머니는 벼 두 가마니를 각기 겨드랑이에 끼고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는데요, 일년 농작물을 그렇게 혼자 집으로 날랐다고 합니다.” 반씨 가족에 구전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재간 있는 조부와 부지런한 조모가 있어서 식구들은 배를 곯지 않았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 생활은 갈수록 쪼들려갔다. 1918년, 조부는 1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배를 이용하여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로 이동, 강 이쪽의 어느 무인지경에 이불 짐을 내려놓았다. 키를 넘는 쑥대밭이었지만 온 가족이 땀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자족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쌀뒤주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게 되자 반씨 가족은 이번에는 오지의 길림시(吉林市) 화전(樺甸) 지역으로 이주를 했다.

1924년, 반춘방은 화전자의 산골에서 고고성을 터뜨렸다. 아버지 반화정(潘化晶)은 어린 반춘방에게 어쩌면 구름 같은 신기한 존재였다. 지척에서 손에 잡힐 듯 하면서 또 하늘가의 아득한 곳에 있었다. 늘 어디론가 바람처럼 훌 떠나버렸고 어느 날인가 귀신처럼 불쑥 집에 나타났다. 그의 비밀스런 행적은 8.15 광복 후에야 비로소 정체를 전부 드러냈다.

“아버지는 반일지사였는데요, 독립군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반춘방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옛 형상이다.

광복이 나자 아버지는 이승만정부의 요청으로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갔고 한때 정부 요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어린 딸애는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버지는 짬만 있으면 낚시를 들고 동네어구의 강을 찾았다. 그때면 반춘방은 다라치(다래끼의 방언)를 둘러메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낚시 바늘에 파리를 꿰어 물속에 넣었다. 낚시찌가 물속에 쑥 들어가면 곧바로 낚시를 잡아챘고 잇따라 딸의 손바닥 크기의 붕어가 물위에 불쑥 뛰어올랐다.

조선 글도 이때 강가의 모래 위에 물고기처럼 뛰어다녔다. 아버지는 꼬챙이로 모래 위에 자모음을 쓰고 딸애가 그걸 읽으면서 다시 모래 위에 옮기게 했다. 훗날 반춘방이 자필 기록물로 쓴 조선 글은 이렇게 눈과 손에 처음 익혔다. 동네의 조촐한 온돌방에 작은 서당이 생긴 것은 썩 후의 이야기이다.

노래도 이렇게 강가에서 물처럼 흘렀고 어느덧 물줄기를 이뤘다. 아버지는 퉁소를 잘 불었고 장구 치기를 즐겼다. 판소리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익힌 노래재간은 미구에 반춘방을 공연 무대에 올렸다. 반춘방은 여섯 살 때 길림(吉林)교회 주일학교의 학생으로 되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연분홍 옷차림으로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새 아침 다가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 좋다…”

그런데 ‘오막살이의 우리 집’에 난데없는 먹구름이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산후병으로 급작스레 사망했고 아버지는 나그네처럼 그냥 풍진세월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린 반춘방은 졸지에 홀로 초가에 남았다. 추운 겨울에도 핫저고리에 홀치마 차림이었고 얻어서 꿰찬 신발 코숭이에는 발가락이 삐죽이 머리를 내밀었다. 반춘방은 아홉 살 때 친척을 따라 길림시 영길현(永吉縣) 대툰(大屯)의 개척지로 멀리 자리를 떠야 했다. 그 후 아버지가 재혼했고 반춘방은 차츰 나이가 들면서 잡역 생활을 시작했다. 일장기는 미구에 반도를 이어 동북 땅 나아가 대륙 지역에 휘날리고 있었다. 반춘방은 날이 갈수록 지인들이 왜서 저마다 반일행동에 나서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난의 행군 같은 지긋지긋한 세월은 강물처럼 그렇게 하루 또 하루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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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용군 7지대 선전대 여대장이였던 반춘방과 남편 이정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고했다. 그해 말 반춘방은 단연 화전 군정대학에 신청한다. 6개월의 훈련과 학습을 마친 그는 조선의용군 7지대 선전대에 가입하였다. 7지대 선전대는 두 팀이었는데, 반춘방이 제2선전대 대장을 담임했다.

이 무렵 두만강을 건너온 김광출(金光出)도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에 가입하였다.

조선과 중국 여덟 극단의 미치광이 배우

김광출의 본명은 항렬자를 따른 김응선(金應善)이다. 훗날 연극에 미쳤다는 의미의 김광출(金狂出)이라고 개명했다. 그러다가 이름자에 달린 미친 광(狂)을 빛날 광(光)으로 다시 바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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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말경 연변 팔도지역의 한 조선인 가족 (제일 아래쪽 줄의 우2가 최금순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시의 한 아파트단지 자택에서 김광출의 미망인 최금순을 만났다. 86세 고령의 최금순은 이날 지금까지 서랍에 꼼꼼히 챙겨두고 있던 남편의 자필 이력서와 옛 사진첩을 내놓았다.

자필 이력서에 따르면 김광출의 부친 김병모(金炳模)는 1920년대 반도 노동운동의 백미를 장식한 원산 총파업의 주모자였다. 이 때문에 체포되어 5년 형기를 살았고 김광출이 여섯 살 나던 때 비로소 출옥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가문의 대들보가 왕창 무너진 셈이었다.

“엄마는 유모 노릇을 하다가 남의 집의 빨래를 하였고 누님은 민며느리로 들어갔습니다. 형은 시내 어느 자전거수리공장의 직원으로 되었고 저(김광출)는 학교에서 중퇴하고 신의주 인쇄소의 식자공으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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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출의 자필 이력서 일부

어릴 때의 서글픔은 자필 이력서의 구구절절에 먹물처럼 피고 있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종이를 바르는 풀을 남몰래 먹기도 했다고 김광출은 훗날 식구에게 회억한다. 다행이 이모의 덕분으로 김광출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상업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었다고 자필 이력서가 서술한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은 기회를 소중하게 여긴 김광출은 학기마다 우등생으로 되었으며 이 때문에 급장으로 될 수 있었다.

일희일비의 세상이었다.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일어났다. 하늘 아래의 큰 연극무대를 뛰노는 것 같았다.

김광출이 연극을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자필 이력서에서는 읽을 수 없다. 분명한 건 그가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힌 생활이 곧바로 드라마 같은 연극 그 자체였다. 1945년 8월 김광출은 조선 평안북도예술공작단 배우로 있었으며 이듬해 10월부터 선후로 조선 평안북도 청춘무대와 조선 평안북도 건설무대의 배우로 있었다.

김광출은 자필 이력서에 이 무렵의 한 단락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가 의도적으로(?) 신분을 숨긴 조직은 기실 반도의 문헌자료에서도 읽기 힘들다. 김광출이 자식들에게 밝힌데 의하면 그는 조선 3.1극단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3.1극단은 8.15 광복 후 반도 북부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체로 설립한 민간단체이다. 작가와 연극인, 무용인, 영화인들의 이 모임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1948.9.9) 후 작가동맹, 예술단, 음악조직 등등으로 각기 분리, 발전되었다.

조선 극단의 유명인이었던 김광출은 나중에 어찌어찌하여 연변에 이주한다. 1947년 3월부터 김광출은 길림성 도문(圖門)의 노농(勞農)극단 감독으로 있었다고 자필 이력서에 기록한다. 국경을 넘은 ‘팔방 배우’의 연극 무대는 결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었다. 김광출은 북부의 할빈(哈爾賓)에 외출을 갔다가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의 공연을 관람하게 된다. 이때 김광출은 좀치도 망설이지 않고 단연 입대를 신청했다. 그가 도문에서 극단 감독으로 입단한 그해인 1947년 7월이었다. 김광출의 말을 그대로 빈다면 선전대의 연극에 미쳐서 의용군의 군복을 입었고 이때에도 연극 감독이자 배우 신분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설명을 하고 건너가자. 조선의용군은 전신이 1938년 대륙 중부의 호북성(湖北省) 한구(漢口)에서 창설된 반일독립단체인 조선의용대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의 주력은 화북(華北) 조선독립동맹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으며 팔로군(八路軍)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포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주덕(朱德)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동북에 진출했다. 11월,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 근교의 오가황(吳家荒)에서 회의를 열고 일부 간부를 제외한 대원들은 3개 지대로 나뉘어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중국 해방투쟁에 참가한다고 선포했다.

조선의용군 1지대는 심양을 중심으로 한 남만 지역, 3지대는 할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 지역, 5지대는 연길(延吉)을 중심으로 한 동만 지역으로 파견된다. 의용군 5지대가 동만으로 향발하던 도중에 길림에서 30여명이 선발되어 새로 7지대가 성립되었다. 이때 반춘방은 조선의용군 7지대 선전대에 편입되며 뒤미처 연변 지역으로 진군, 연길에 도착한다. 5지대는 연길 서쪽의 조양천(朝陽川)에 주둔하여 연변 일대에서 활동, 군대확장과 선전공연 활동을 전개했다.

7지대 선전대는 연길에 도착하자마자 안도(安圖)에 토비숙청을 나갔다고 반춘방이 자필 이력서에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안도에서 돌아온 후 5지대와 더불어 개편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선전대는 나중에 다 길림성 군구 (정치부) 문공단으로 개편을 했습니다. 문공단은 2개 대대로 나뉘는데요, 1대대는 현재의 길림성가무단의 전신으로 한족들이고, 2대대는 현재의 연변예술단 모태인데요, 조선족들이었습니다.”

그나저나 반춘방은 얼마 후 선전대 생활을 떠나게 된다. 1949년, 안도 토비숙청 때 장관 이정림(李正林)과 만나 천년가약을 맺는데, 이정림이 도문시 무역국(군사관제) 국장으로 취임하면서 이때부터 반춘방은 예술단과 ‘국경’을 사이에 두게 되었다.

이를 즈음하여 의용군 선전대원 김광출은 국경을 넘나드는 곡절을 겪었다. 그가 소속한 부대는 국경을 넘어 조선인민군에 개편되고 있었다.

사진에 남은 70 전의 기록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개시, 동북지역에 진출했다.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르면 소련군은 동북지역을 장개석(蔣介石)의 국군에 넘겨줘야 했다. 명령을 받고 동북에 육속 진출한 팔로군, 신사군(新四軍)은 동북인민자위군과 함께 동북인민자치군을 구성했다. 1946년 1월, 동북민주연군으로 개칭하고 임표(林彪, 훗날의 국방부장)가 총사령관을 담임했으며 동만, 서만, 남만, 북만 4개 군구를 통솔했다. 1948년 1월, 동북민주연군은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 민주연군 본부를 동북군구 겸 동북야전군 지도기관으로 개칭했다. 동북야전군의 12개 종대는 1948년 말 중국인해방군으로 12개 군단으로 개칭되며 이듬해 3월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다.

김광출이 소속한 조선의용군 3지대 선전대도 이에 따라 선후로 동북인해방군 동북군구 독립11사단 선전대,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164사단 선전대로 개칭된다. 반도의 정세가 갈수록 긴장되면서 중국공산당 부대의 조선인 현역군인은 상부의 명령과 배치에 따라 조선에 대량 진출했다. 조선인이 주축을 이룬 제164사 제166사단, 제156사단 466연대는 각기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 제12사단 30연대를 편성한다. 기타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 군인도 상당 부분 국경을 넘으며 인민군의 기타 보병사단과 제603기계화연대, 제105탱크사단을 편성하거나 배속되었다.

구술과 논문, 군사(軍史), 등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조선에 귀환한 조선인 군인은 약 5만명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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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하단부터 윗쪽으로 두번째 줄의 좌1이 정률성, 좌3이 김광출이다

김광출은 조선인민군 예술극단에 편입되어 배우 겸 감독으로 되었다. 이 무렵 소련인 고위간부를 환송하면서 촬영한 것이라고 전하는 옛 사진에서 김광출은 인민군 복장 차림으로 정률성(鄭律成)과 나란히 등장한다.

정률성은 한국 전라남도 출신으로 본명이 정부은(鄭富恩)이다. 1933년 정률성은 당시의 중국 수도 남경에 와서 조선인들의 항일 조직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혁명을 시작했으며 한편 음악을 배웠다. 1937년 7.7사변 후 중국공산당의 성지인 연안(延安)에 갔다. 1938년 8월 노신(魯迅)예술학원을 졸업한 정률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을 했다. 그는 선후로 '중국의 아리랑'이라고 불리는 ‘연안송(延安頌)’,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인 ‘팔로군 행진곡’ 등 많은 노래를 작곡했다. 1942년 8월, 조선의용군의 유생역량을 보존하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중공중앙과 팔로군은 화북(華北)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는데, 이때 무정(武亭, 의용군 총사령관)이 교장을 담임하며 정률성이 교무주임을 담임했다. 1945년 말, 조선에 간 후 정률성은 1947년에 조선 보안간부 훈련대대부 협주단을 창단한다. 조선인민군은 보안대에서 출발하는데, 협주단은 나중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 예술단으로 승격되며 조선인민군협주단으로 개명된다. 정률성은 또 3.1독립운동을 기리는 노래 '3.1행진곡', 조선인민군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 대합창곡 '동해어부' 등 등 작품을 남겼다. 그러다가 1950년 9월, 중국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요청을 받고 김일성 주석의 동의를 받아 중국에 돌아와서 음악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가만, 김광출은 자필 이력서에 그가 1949년 8월 조선에 진출하여 인민군의 일원으로 되었다고 분명히 기술한다. 이에 따르면 사진은 분명히 1949년 말이나 1950년 초에 촬영된 것이라야 한다.

그런데 이 시간대에 정률성은 더는 인민군 군복을 입지 않고 있었다. 그는 1949년 초 이미 인민군에서 전근되어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되었던 것이다.

“사진에는 또 복수의 소련인이 인민군과 함께 출현하는데요. 소련군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이 선언된 후 곧 철수를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소련은 그해 12월 25일 조선에서 소련군이 최종 철수했다고 선언하는데요.”

그나저나 김광출은 미구에 정률성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나눌 수 있었다. 평양이 아닌 북경이었다. 1953년 1월, 부상으로 단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김광출은 그예 중국에 이불 짐을 내려놓았다. 연변 초대 주장 주덕해(朱德海)의 연극단 창설 요청을 수용했던 것이다. 주덕해는 조선의용군 3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지대의 연극 ‘미치광이’ 김광출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1956년부터 김광출은 연변가무단의 파견을 받아 중앙연극대학 감독 연수반에서 공부를 하면서 1년 남짓하게 북경에 거주하게 되었다. 정률성은 이미 1950년 9월 중국에 돌아왔으며 북경에 정착하고 있었다.

김광출이 입단한 연변가무단(전칭 연변조선민족자치구 가무단)은 연변예술단의 전칭이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되면서 바뀐 기구 명칭이다. 이에 앞서 연변문예공작단(연변문공단)으로 불렸다고 한다. 참고로 연변조선민족자치구는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된다. 이때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조선민족’의 ‘민’자 생략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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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연변 연극사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 대표작의 하나 "장백의 아들" (감독 김광출) 한 장면

김광출은 연변가무단의 연극 감독, 업무비서로 취임했다. 그 후 연극단은 연변가무단에서 분리되어 연길현연극단과 합병, 연변연극단으로 되었으며 2006년 종국적으로 연변가무단에 합병되어 연극부로 편성되었다.

김광출은 연변 연극단의 견증자요, 그보다 반백년 역사의 일부이다. 회갑 나이에 즈음한 1984년 김광출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로부터 그가 30여 년 동안 주 문화예술사업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상을 수여받았다. 김광출은 또 조선으로부터 최고의 훈장인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조선에 남겨둔 가족에 선물로 줬다고 하는데요. 가족과 연락이 끊어진 현재로선 조선 3.1극단 창시자의 신분이나 인민군예술단의 최초의 연극 감독 신분 때문에 이 훈장을 받은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의용군 선전대장 반춘방은 도문시 무역국장인 국장 남편을 따라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물오리 같이 물줄기 따라 흐른다네

반춘방은 연대에 따른 이력을 자필 회고록에 또박또박 적어놓고 있었다. 그의 의용대 선전대장의 신분은 백화상점과 공장, 회사의 직원, 공장장, 주임, 의사로 변신을 거듭한다. 와중에 춤과 노래는 물오리 같이 간간이 물줄기에 내려 앉아 드문드문 흐르고 있었다.

“1950~1960년 도문시 무역국 용정백화상점 인사계획과 근무, 공회 주석

1958~1959년 용정진(龍井鎭) 편직물공장 공장장

1961~962년 연길현공소(供銷, 공급과 판매)합작사 통계 사업

1965~1966 연길현특산물회사 폐품상점 주임“

그 후 반춘방은 맨발의사(초급의료기술자) 훈련반에 참가하여 100일 동안 인체구조와 약학, 침구, 병리 등 의학지식을 습득한다. 훈련을 마친 후 특산물회사에 돌아와 기구를 설치하고 간단한 의료작업을 시작한다.

“재직기간 문화 활동에 적극 참석했는데요, 현지 문화관의 가무단 기술 지도를 맡기도 했어요. 제가 지도한 무용은 길림성 문화회보공연대회에서 단체우수상을 받았습니다.”

반춘방은 상업국 간부 등으로 일하다가 이직(離職)한다. 그의 자필 경력서는 이때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이왕지사는 그렇게 물오리처럼 물줄기를 따라 덧없이 흘러갔다. 아니, 물줄기는 한때 난데없는 벼랑에 떨어져 내렸다. 남편 이정림은 1957년에 자원 퇴직을 하였다. 시 한 수가 반혁명 죄장으로 되어 더 이상 근무를 연속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백의동포는 물오리와 같이 물줄기 따라 흐른다네.

산간 곳곳 벽촌을 가리지 않고 흐르는 물줄기는

백의동포의 보금자리라네…”

사실상 ‘물오리’의 이 보금자리에서 김광출도 나중에 호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예술단의 막역지우인 동갑친구 정진옥(鄭鎭玉)이 1960년대 중반에 강 건너 저쪽에 물오리처럼 훌쩍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정진옥은 한국 경상남도 통영군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일찍 요녕성 무순(撫順)에 이주했으며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공업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남만지역에서 활약하던 조선의용군 1지대에 입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지대의 후신인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의 선전대(문예공작단) 연주자, 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조선에 간 후 정진옥은 또 조선인민군 협주단 작곡가로 활동했다. 1952년 다시 중국에 와서 장춘영화촬영소 작곡가로 사업하다가 그해 말부터 연변가무단의 음악교원과 단장을 역임했다고 ‘한겨레음악대사전’이 수록한다. 이런 비슷한 경력은 분명히 김광출을 알게 모르게 정진옥과 한 줄에 엮어놓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대륙에 이변이 생기자 정진옥은 급기야 다른 물줄기를 갈아탔다. 조선으로 또다시 들어가며 선후로 조선인민군 협주단 작곡가로, 평양시예술단의 창작과장으로 있었다. 창작활동에 종사한 그동안 정진옥은 많은 명곡 음악을 내놓았다. 일찍 1956년 세계청년연환축제에서 “장백의 노래”로 은메달을, 1957년 세계청년연화축제에서 “처녀의 노래”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조선에 돌아간 후 가극 ‘청춘과원’을 작곡한 공로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뒷이야기이지만, 정진옥이 외국으로 도피, 도망한 행각은 연변의 그의 적지 않은 지인들에게 불똥을 튕겼다고 한다. 김광출은 또 옛 부대의 장관 주덕해를 보호하고 지지하면서 ‘보황파(保皇派)’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더구나 ‘홍위병(紅衛兵)’들의 뭇매를 자주 맞아야 했다.

주덕해의 부인은 1977년경 남편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에 즈음해 빈관(賓館)에서 특별히 김광출의 가족을 초대했다고 한다. 김광출의 아들 김홍일의 한 단락의 회억이다. “주덕해의 부인님은 참으로 인자하고 자상한 분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남달리 즐긴다고 해서 따로 빵을 챙겨주던데요.”

강물은 그냥 흐르지만 물오리의 울음소리는 더는 들을 수 없다.

반춘방은 자필 이력서에 흔치 않게 사촌 오빠의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큰아버지의 둘째 아들 반영창(潘永昌)은 어린 김일성의 동창이었다고 한다. 길림 육문(毓文)중학교에 하숙하면서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하루에 좁쌀죽 두 끼를 먹으면서 어렵게 공부했던 반영창은 졸업 후 고물장사로 되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길현 대툰에 만주척식회사의 개간지를 헐값으로 사서 농사를 했다. 그때부터 반영창은 더는 배를 곯지 않는 유족한 농사꾼으로 되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한 마리의 물오리 같이 풍진세월의 물줄기 속에 흔적 없이 어디론가 멀어졌다.

반춘방은 그의 자필 이력서 말미에 누군가에게 거듭 묻고 있었다.

“누구는 글에 기록하는 천하의 영웅호걸이 되는데요, 왜서 누구는 또 아무도 기억을 못하는 초야의 무명인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취재/글 김호림(중국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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