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正善
2021-01-15 08:01:11 출처:cri
편집:朱正善

푸미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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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족은 역사가 유구한 민족이다. 주로 운남(雲南)성 노강(怒江)주와 난평(蘭坪)현, 여강(麗江)시 녕랑(寧蒗)현과 옥룡(玉龍)현,적경(迪慶)주의 유서(維西)현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일부가 운현(雲顯)과 봉경(鳳慶), 중전(中甸) 그리고 사천성의 목리(木裏)와 염원(鹽源),구룡(九龍) 등 현에 살고 있다.

푸미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적은 소수민족으로 2003년 기준 총 인구가 3만2700여명이었다. 이들은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고 다신 숭배를 하며 소수가 도교와 장전불교를 신봉한다. 마을마다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신성 불가침의‘신림’(神林)이 고정되어 있다. 

푸미족 마을은 산비탈에 지어져 있고 혈연 관계에 따라 모여 살며 마을과 마을간 거리가 가깝다. 가옥은 보통 통나무로 2층짜리 집을 지어 아래층에서는 가축을 기르거나 잡동사니를 보관해두고 사람은 윗 층에 거주한다.  

푸미족의 민족언어는 푸미어이다. 푸미어는 한어-티베트어계의 티베트미얀마어족 강어(羌語)갈래에 속하며 남, 북 방언으로 나뉜다. 하지만 방언 간 차이가 크지 않아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과거 녕랑과 목리(木裏)의 푸미족은 티베트 문자로 푸미어 표기를 하고 본 민족의 전설이나 이야기, 가요를 적기도 했으나 널리 유전되지는 않았다. 지금 푸미족 지역에서는 모두 한문을 통용한다.

푸미족의 지칭인 ‘푸미’는 푸미어의 음역으로 원 뜻은 ‘백인’(白人)이다. 그 외 각지의 푸미족은 나름의 이름이 있는데 난평과 여강, 영승(永勝)의 푸미족은 푸잉미(普英米), 녕랑의 푸미족은 ‘푸르미’(普日米),페이미(培米)라고 자칭한다. ‘미’는 푸미어에서 사람이라는 뜻이고 푸잉, 푸르는 모두 희다는 ‘백’을 의미해 결국은 모두 ‘백인’이라는 뜻이다. 푸미족은 예로부터 흰 색을 숭상했고 흰색이 길함을 상징한다고 여겨 본 민족을 ‘백인’이라고 불렀다.

푸미족에 대한 기타 민족의 호칭은 각각이다. 티베트족과 나시족은 푸미족을 ‘파’(巴) 또는 ‘보’(博)라고 부르고 이족은 ‘워주’(窩珠), 리수족은 ‘류류파’(流流帕)라고 불렀다. 한문의 역사문헌을 보면 푸미족을 ‘파쥐’(巴苴) 또는 ‘시판’(西番)이라고도 호칭했다. 푸미족의 타칭을 보면 ‘시판’이란 호칭은 진(晉)나라 때 이미 나타났다. 당나라 때에는 시판이 투판(吐蕃)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송나라 문헌에는 ‘시판’과 ‘투판’ 이 각각 기재돼 있다. 1960년 10월 국무원은 본 민족의 염원에 따라 이들을‘푸미족’으로 공식화했다.

한문 사서의 기재와 본 민족의 전설, 민족학 자료를 보면 푸미족은 중국 고대 유목민족인 저강(氐羌)족군에 속한다. 이는 민족학과 언어학 측면으로부터도 입증됐다. 고대 강(羌)인들은 흰색을 숭상하고 화장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푸미족도 그러했다. 그리고 동한 시기 ‘바이랑’(白狼, 흰 늑대)등 부락도 한 왕조에 ‘바이랑가’(白狼歌)를 바친 적이 있는데 이는 역사가 가장 오랜 강족 언어기록이다.최근 년간 학자들은 현지 조사를 통해 ‘바이랑가’에 나타난 34개 단어가 푸미어와 완전히 같거나 약간 다름을 발견했다. 언어학 차원으로부터도 푸미족이 바이랑 고국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푸미족의 선민은 원래 감숙(甘肅)성 남부와 청해(靑海)성 동부에 거주했는데 후에 청해-티베트 고원의 동부지역으로 이주하고 점차 금사강(金沙江)과 아롱강(雅礱江)을 따라 남하했다. 기원 7세기 이전에 이들은 이미 사천의 월서(越西)와 면녕(冕寧),한원(漢源)、구룡 및 석면(石棉) 등 지에 살았으며 당시 서창(西昌)지역의 주요한 민족의 하나였다. 푸미족의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처음에 백설로 뒤덮인 곤륜 산맥일대에 거주했지만 후에 산과 강을 넘어 남하해 점차 따뜻하고 습윤한 운남과 사천 일대에 정착했다. 지금도 푸미족의 역사에 정통한 푸미 노인들은 명절 때면 ‘궁가링가’(貢嘎嶺歌)를 불러 조상에 대한 숭배와 선민들의 옛 삶터에 대한 그리움을 표한다. 또 장례식 때 읊조리는 ‘개로경’(開路經)에서도 푸미인들은 사천 파당(巴塘),리당(理塘),궁가산(貢嘎山)을 선민들의 거주지와 영혼의 귀속처로 간주하고 있다. 당송시기 사서를 보면 푸미족의 선민으로 알려진 ‘시판’에 대한 기재가 아주 많다. 이는 푸미족이 이 때 한족 및 기타 민족과 밀접한 왕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 역사 조대에서 원나라가 푸미족 형성의 중요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 원나라 군은 많은 ‘시판’인을 군에 징용해 운남 일대에 출정시켰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운남 서북지역에 남은 ‘시판’인이 바로 지금의 푸미르족의 주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13세기 이후, 푸미족은 운남의 녕랑, 여강, 유서, 난평 일대에 정착하며 떠돌이 유목생활을 접고 농삿 일에 종사하기 시작했으며 가축을 기르고 수렵하며 수공업도 발전시켰다. 명나라 때에는 푸미족이 현지의 토사직을 맡기도 했으나 후에는 나시족 토사의 지배를 받았다.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여강, 난평, 녕랑 등 현을 잇달아 해방하면서 푸미족은 사회주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푸미족의 생활수준도 제고되고 푸미족 지역에 전대미문의 새 국면이 형성되었다. 정부는 1954년에 푸미족 지역에 민족향을 세웠고 1987년11월에는 난평바이족푸미족 자치현의 설립을 정식 허가했다. 푸미족 중에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도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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