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1-05-17 15:59:09 출처:cri
편집:李仙玉

[오피니언]국민을 위하는 자오위루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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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자오위루 기념관)

2021년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백 년의 세월 속에서 많은 우수한 공산당원들이 각 분야에서 나라와 백성들에게 복을 마련하고 고유의 정신적 부를 창출하며 공산당의 정신세계를 풍부히 했다.

그런 우수한 공산당원의 대표 중 한 명이 바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자연과 싸우며 국민들의 생산과 생활여건을 개선한 모범적인 공직자 자오위루(焦裕祿)이다. 1922년 산둥(山東)에서 태어난 자오위루는 어려서 온갖 고생을 다 했고 1946년에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50년부터 허난(河南)성에 배치되어 웨이스(尉氏)현 다잉(大營)구 구청장과 공산주의 청년단 정저우(鄭州) 지구위원회 제2서기, 뤄양(洛陽) 광산기계공장 공장장 등 직무를 담임했고 그 과정에 간질환을 앓게 되었다.

1962년, 허난의 동쪽에 위치한 란카오(蘭考)현이 심각한 홍수와 황사, 알칼리 토양 등 3대 자연재해에 직면하였고 바로 그런 때 자오위루는 란코우현 당위원회 서기로 부임했다. 자오위루는 시시로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며 사람들을 이끌고 황사를 막고 알칼리 토양을 개량하며 생산과 생활의 자구책을 마련했다. 강도 높은 업무로 자오위루의 병세는 점점 더 위중해졌으나 그는 1964년 42세를 마감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란카오를 떠나지 않았다. 자오위루 정신의 격려하에 란카오현은 3년의 노력을 통해 란카오의 자연 개량 청사진을 현실화함으로써 자오위루의 꿈을 실현했고 1965년 란카오현은 드디어 식량자급을 실현해 식량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6년 <인민일보>가 한 마음으로 국민을 위한 자오위루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오위루를 따라 배울 것을 호소하는 사설을 발표했다. 그로부터 자오위루의 고상한 인품과 숭고한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현 당위원회 서기의 모범> 자오위루는 모든 공직자들의 본보기로 자리매김했다. 평생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자오위루 정신은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어제와 오늘, 내일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도록 사람들을 격려한다”.

국민을 가까이 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것은 자오위루 정신의 기본 취지이다. 현급 정부는 국민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부로 국민들은 현 정부를 통해 가장 먼저 정부를 알고 현 당위원회 서기의 언행을 통해 공산당을 이해한다. 자오위루는 란카오현 당위원회 서기로 가면서 벼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도모하고 국민의 효자가 되는데 포지션을 맞추었다. 자오위루는 “우리는 국민의 부모가 아니라 국민의 아들, 그것도 국민의 말을 잘 듣는 효자이다. 우리는 국민을 대신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이고 우리는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고용인이다”고 말했고 국민을 위하는 정신을 평생 실천했다.

란카오현 당위원회 서기로 부임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권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어떻게 하면 황사를 막고, 어떻게 하면 란카오의 환경을 정비하며, 어떻게 하면 란카오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만 생각한 자오위루는 임종을 앞두고 “나를 란코우의 모래땅에 묻어주시오. 살아서 막지 못한 황사를 죽어서라도 막겠소”라는 유일한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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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50여년전 자오위루가 몸소 심은 나무)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은 자오위루 정신의 본색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오위루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농민들의 상황을 가장 잘 알았고 후에 란카오현 당위원회 서기가 된 후에도 일말의 낭비도 허용하지 않고 한 점의 혜택도 누리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 집기 교체를 제안 받자 “낡은 의자에 앉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라고 일침을 놓았고, 부인이 새 양말을 사자 여러 곳을 꿰맨 양말이 “아직도 신을 만 하다”고 거절했다.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싸우는 간고분투의 정신은 낡은 집기를 사용하고 양말을 꿰매서 착용하는 등 교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미색과 금전, 권력의 유혹을 멀리 하는 일종의 “계율”이고 부패함을 막기 위한 “스스로의 경계”인 것이다.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것은 자오위루 정신의 실사구시의 구현이다. 란카오현에 도착한 후 자오위루는 우선 120명으로 구성된 조사팀을 이끌고 란카오 각지의 자연상황을 자세하게 조사했다. 란카오에서 근무한 480일 동안 자오위루는 란카오현 149개 생산대대 중 120여개 생산대대를 방문하고 란카오의 실제상황에 근거해 황사와 홍수, 알칼리 토양 대비방안을 제정했다. 평소의 업무에서도 자오위루는 “회의를 적게 하고 업무를 많이 보며, 빈 말을 적게 하고 실용적인 일을 많이 하며, 주마간산 식의 지도방법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맞받아 나아가는 것은 자오위루 정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법보의 구현이다. 자오위루는 중국에서 자연재해가 가장 심각한 란카오현에 파견되어 어려움 앞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움 앞에서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란카오현의 열악한 자연 환경을 개변하고 자연재해 앞에서 손 놓고 있는 현지인들의 관념을 되돌리기 위해 각 마을을 돌아보며 세부적인 계획을 제정하고 스스로 변화를 유도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은 자오위루 정신의 정치적 본색이다. 자오위루는 짧은 일생을 통해 국민을 위해 근면하게 일하고, 청렴하게 봉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공산당인의 본색을 보여주었다. 지도간부로서 자오위루는 명예도, 이익도 바라지 않고, 국민의 행복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평생을 쏟아 부었다. 심한 통증을 버티면서 생명의 마지막까지 싸운 자오위루는 주변의 다른 사람이 질병에 걸리면 자신과 다른 기준을 내세워 그의 업무를 중단시키고 충분히 휴식하게 했다. 그는 마음 속에 국가와 국민, 동료를 담았고 유독 그 자신만을 두지 않았다. 그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고 더는 버티지 못하고 병원으로 가면서도 업무를 지시했으며 병상에 누워서도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 한 가지만 물었다. “란카오의 자연재해 방지상황은 어떻습니까?”

자오위루는 이렇게 사심이란 한 점도 없이 나라와 국민에 모든 것을 바치며 그의 위대한 삶을 살았고 국민을 위하는 자오위루 정신은 영원히 사람들을 고무격려하고 있다.

출처: 조선어부 논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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